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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공부

중국 국명

by DIY연구소 2022.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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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공식 국명은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다.

이것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과 더불어 사용되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근대 이전 중국의 국명은 `황하`라고 불렸다.
그 시대에는 국명이 없었다.

옛 진나라 이전에 `황하유역`에서 많은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장기적인 서로 왕래와 문화교류 및 민족의 혼합 그 때문에 한나라 이후 황하를 '한족'이라고 칭했다.
현대 우리가 말하는 중화 민족이 바로 중국 역사상 한족 및 기타 민족이다.
이것은 끊임없이 통합하는 결과이다.
중국은 세계 문명 발전국 중에 하나이며 또는 동아문화의 주체이다.

인류 문화상의 중요한 위치이며 이집트 및 서아시아 역사의 기원은 중국보다 빠르지만 그들의 문명은 이미 단절되었다.
중국 역사는 유고하고 아울러 처음부터 끝까지 끊겨지지 않았다.
중국은 기원전 2,000년 전후 이미 국가 조직의 왕조를 추진하고 그 후 약 2,000여년간 각 나라 승패의 변혁이 있었지만 정부의 제도사상의 전승은 대체적으로 변함없이 이어졌다. 이것이 바로 중화민족이 공유한 문화자산이다. 또 세계문화의 중대한 공헌이다.

중국 문화적 기원 중국 건국이래 신석기 문화유산의 발견으로 중국역사는 약 2, 3천년 진전되었다.
우리는 중국문화 기원에 인식하여 황화유역에 국한하지 않았다.
다원화와 공존한 관념으로 대처하였다.
신석기 시대부터 하나라까지 옛 중국 농촌시대에서부터 국가의 연변(변화)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하나라(하주)에서부터 청동시대의 국가국으로 돌변하였다.

상나라부터 청동 주조의 기술이 매우 형성되었고 여러 방면의 문화도 따라서 높은 수준으로 향상하였다.
구석기 시대 인류를 최초 석기 주요 공구를 사용하며 고고학자들이 이 신시대를 석기를 청했다.
청을 최초로 태격하는 방식으로 점차 연마하는 기술을 알았으며 구석기 제조 방법과는 다르다.
석기시대는 신석기와 구석기시대로 분류하였다.

건국이래 고고학자들은 중국 경례에서 많은 구석기 시대 인류의 화석 및 유적을 발견하였다.
예를들면 웅남의 `원모인`은 성서성에서 발견하는 `난전인`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북경인이 `산전동인`이다.
`북경인`은 국경서남에 있는 주구점에서 발견한 원시인류이며 오늘날까지 50만년전이다.

구석기시대 조기원인이 속하기도 한다. 북경인은 서서 걸을 수 있으며 사냥 및 식물과 실을 채취해서 생활했다.

상고시대부터 황하유역에 도읍을 세운 나라들은 항상 그들이 사는 지역을 "화하(華夏)"/"중하(中夏)"/"중화(中華)"/"중국(中國)"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왔으나, 고대국가 시절에 이러한 명칭을 공식적인 국명으로 사용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세워진 "중화민국(中華民國)"에서 그러한 이름을 처음으로 국명에 사용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서경(書經)/무성(武成)/전(傳)≫에는, "관복의 문채가 아름다웠기 때문에 "화(華)"라 하였고, 대국이었기 때문에 「夏(하)」라하였다.

(冕服采章曰華, 大國曰夏.)"는 기록이 있고, ≪좌씨전(左氏傳)/정십(定十)/소(疏)≫에는 "성대한 예악제도를 갖추었기 때문에「하(夏)」라 하였고, 아름다운 복장을 갖추었기 때문에 「화(華)」라 하였다.(中國有禮儀之大故稱夏, 有服章之美謂之華.)"는 기록이 있다. 중국의 고대국가들은 한결같이 예악제도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당시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예악제도에 필요한 아름다운 복장을 구비하고 있었다는 것은 바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화하(華夏)"는 바로 문화를 가진 대국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리고 "중(中)"은 사방의 중앙에 위치한다는 뜻이므로, "중화(中華)"는 사방의 중앙에 위치한 문화를 가진 민족을 뜻하고, "중하(中夏)"는 사방의 중앙에 위치한 대국이란 의미를 가진다.

중국이라는 말도 아주 오래전인 서주(西周)시대부터 사용되어진 용어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 말의 의미가 다소 다양하게 사용된 적도 있었다.
즉, ≪시경(詩經)≫에서는 "수도"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大雅/民勞> : "惠此中國, 以綏四方."), ≪맹자(孟子)≫에서는 "제왕이 사는 곳"이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萬章上>"夫然後之中國踐天子位焉.") 가장 보편적인 개념으로 사용된 것은 역시 "중하(中夏)의 나라"라는 의미이다.

(≪詩經 小雅 六月序≫ : "小雅盡廢, 則四夷交侵, 中國微笑.")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인들은 고대로부터 자신들의 주변국들에 대한 문화적 우월성을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들의 주변 사방에 있는 나라들을 "사이(四夷)"라고 낮추어 불렀다. 즉, 황하(黃河) 유역을 중심으로, 그 동쪽에 있는 민족을 "동이(東夷)", 서쪽에 있는 민족을 "서융(西戎)", 남쪽에 있는 민족을 "남만(南蠻)", 북쪽에 있는 민족을 "북적(北狄)"이라 부르면서 스스로를 과시하였던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사방의 중앙이라는 것도 황하 유역에 불과하였지만, 유구한 세월에 걸쳐 그들의 국경이 점차 확대되면서 그 의미도 점차 세계의 중앙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중국 국명 명칭의 유래
삼황오제 시대
하(夏) = 고대 왕국으로 전설상 왕조
은(殷) -> 주(周) -> 춘추전국시대(진, 제, 초, 조, 한, 위, 연) = 분열 시대
진(秦) = 최초의 통일 왕조
한(漢) =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으로 나뉩니다.
삼국시대(위, 촉, 오) -> 진(晉) = 진(晉)은 서진(西晉)과 동진(東晉)으로 나뉨.

남북조 시대
1) 북조 : 북위 -> 북제 -> 북주
2) 남조 : 동진 -> 송 -> 제 -> 양 -> 진

수(隋) -> 당(唐)

5대 10국 시대
1) 5대(화북 지방) : 후량 -> 후당 -> 후진 -> 후한 -> 후주
2) 10국(황하 외) : 오, 형남, 전촉, 오월, 민, 남한, 초, 후촉, 남당, 북한

송(宋)
북송(北宋)과 남송(南宋)으로 분리.

요(遼) -> 금(金) -> 원(元) = 모두 이민족 왕조로 정복 왕조입니다.

명(明) -> 청(淸) = 청 또한 이민족 왕조이며, 청이 망한 이후 혼란기.

중화민국(中華民國)
現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化國) - 중화민국(대만)
 


중국의 세부적인 역사
선사시대(先史時代)
1927년 중국의 베이징시 외곽 저우커우톈[周口店]에서 제4기 홍적세(洪積世)의 중기 제2간빙기(第二間氷期) 지층에서 직립 유원인 다음의 고인골(古人骨)이 발견되어 북경인(北京人:Sinanthropus Pekinesis)이라는 학명이 붙여졌다. 그 후 마지막 제4빙하기에 현대 아시아인종의 조상인 상동인(上洞人)이 저우커우톈의 석회암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에 들어와서 최고(最古)의 채색토기 문화가 나오는데, 이는 흑/백/홍으로 문양(文樣)을 그린 토기로 화베이 일대에서 남쪽으로는 푸젠/타이완에 분포하는데 1921년 허난성 양사오유적[仰韶遺蹟]에서 출토되어 이 계통의 문화를 앙사오문화라고 총칭한다. 그 다음에 나타난 흑색토기(黑色土器) 문화의 대표적 유적은 산둥성 룽산전[龍山鎭]에서 출토되었는데 이 이름을 따라 룽산문화라고 한다.

고대(古代)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상고의 3황(三皇)/5제(五帝)의 평화 시대를 거쳐 하(夏)/은(殷)/주(周)의 3대(三代)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은허에서 발견된 귀갑수골(龜甲獸骨)에 새겨진 한자의 최고형(最古形)인 복사(卜辭)에 의하여 은대의 사회를 알 수 있다. 은나라는 웨이수이[渭水]에서 일어난 주(周)나라에 의하여 멸망되었는데 주나라는 왕권의 확립과 사회의 안정에 따라 제자백가(諸子百家)와 같은 문화가 발달하였다. 주나라는 BC 770년 수도를 낙읍(洛邑:지금의 洛陽縣)으로 옮겼다. 주나라의 동천 후 춘추(春秋:BC 770∼BC 403)시대를 거쳐 전국(戰國:BC 403∼BC 221)을 거쳤고 BC 221년,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가 천하를 통일하였다. 진나라는 중앙집권적인 군현제도(郡縣制度)를 단행하고 행정/군사/감찰의 3권분립 체제를 세웠다. 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축조하고 국위를 사방에 떨쳐 진(Chin)의 이름이 서쪽에 전해져 ‘china’라는 명칭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BC 207년 진은 멸망하고, 서민 출신인 유방(劉邦)이 장안(長安)을 수도로 한왕조(漢王朝)를 창업하였다(BC 202). 한대에는 서방과의 교통이 활발하여 그 문화가 수입됨으로써 중국 문화의 내용이 충실해졌다. 지방 호족(豪族) 세력이 발전하게 되어 한때 왕망(王莽)이 신(新)을 건국하였지만 15년 만에 무너지고 광무제 유수(光武帝 劉秀)에 의하여 후한(後漢:25∼220) 시대가 된다. 그러나 전한부터의 타성이 그대로 남아 184년 황건(黃巾)의 난을 계기로 몰락의 기로에 들었다.

중세(中世)
황건의 난으로 군웅할거된 중국의 국토는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가 낙양에 세운 위(魏)와 유비(劉備)가 청두[成都]에 세운 촉한(蜀漢), 그리고 양쯔강 중/하류에 손권(孫權)이 세운 오(吳) 등의 3나라로 삼국정립 시대가 되었다. 280년 위의 신하이던 사마씨(司馬氏)가 3국을 통일하여 서진(西晉)이 되었고, 4세기 초 흉노(匈奴)의 침입으로 난징[南京]으로 옮겨 동진(東晉)이라 하여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 후 송(宋)/제(齊)/양(梁)/진(陳)의 4조(四朝)와 오(吳)/진(晉)을 더한 6조(六朝)가 교대되었는데 이 시대의 문화는 귀족과 호족들의 풍족한 생활에서 전개된 화려하고 우미한 것이었다. 한편 화베이지방은 5호16국(五胡十六國)이 서로 싸우다가 선비족(鮮卑族)이 439년 북위(北魏)로 통일하여 송(宋)나라와 대항하여 남북조 형세를 이루었다. 이러한 형세는 581년 남조의 수(隋)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수나라 문제(文帝)는 군권을 강화하고 과거(科擧)제도를 시작하였으며, 양제(煬帝)는 대운하를 만들었지만 고구려와 싸워 대패함으로써 내란이 일어나 618년 멸망하였다. 이연(李淵)이 장안을 점령하고 당(唐)나라의 제위에 올라, 이후 당나라는 넓은 대제국으로 영토를 확대하였다. 귀족의 취미와 외형의 미를 강조하는 당대의 문화는 국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문화는 인접 국가에 파급되어 동아문화권(東亞文化圈)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후기로 오면서 귀족 계급이 몰락하고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 907년 주전충(朱全忠)의 후량(後梁)에 멸망되었다. 이후 5대 10여 개국이 흥망하였다.

근대(近代)
당나라 말에서 5대에 걸친 비약적 산업발전 상황에서 송(宋)나라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송나라의 국책 기조는 재정(財政)에 두었으며 국내 경제를 통제하는 강력한 중앙집권 정치를 완성하였다.당말(唐末) 5대에 걸치는 혼란 속에 귀족계급은 몰락하고 균전제(均田制) 아래에서 발전해온 형세호(形勢戶)라는 신흥 지주층 세력이 신장하였다. 송(宋)나라가 절도사를 폐지하자 그들이 장원(莊園)의 영주가 되고 경작은 전호(佃戶)라는 농노가 주로 하였다. 송대의 문화적 특색은 국수적(國粹的)/내성적/서민적인 점에 있고, 그 기반은 지주/관료들이었다. 한편 화베이지방으로는 넓은 지역에 요(遼)가 대제국을 건설하여 번창하였다(916∼1125). 또 서부에서는 티베트계[西藏系]의 서하(西夏)나라가 일어나 송(宋)나라는 두 나라에게 시달림을 받았다. 12세기에는 만주 지방의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금(金)나라가 급속도로 성장하여 요(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의 수도 카이펑[開封]을 함락시켜, 송(宋)나라는 강남(江南)으로 도망하여 항저우[杭州]에 임시 수도로 정하였으므로 이를 남송(南宋)이라 칭한다(1127). 13세기 초에는 몽골 민족에 의해 원(元)나라가 대제국을 건설하여 남송(南宋)을 멸망시키고 일본에 원정하는 등 여러 지역을 경략하였다. 그러나 원왕조(1216∼1368)는 인구와 문화수준의 열세 때문에 명태조(明太祖)에 쫓겨 북방으로 추방되었다. 명나라는 수도를 베이징[北京]으로 옮기고 중앙집권적 전제국가(專制國家)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국내재정의 곤란과 환관(宦官)의 발호, 기강의 퇴폐 등 문제가 산적한 명왕조가 내란으로 자멸하자, 만주 여진족의 청(淸)이 북경에 들어와 중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현대(現代)
산업혁명을 치른 서구의 문화가 명나라 말기, 청(淸)나라 초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청왕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서구 세력들의 물밀듯한 침점(侵占)으로, 홍콩[香港]을 영국에게, 만주 북방을 러시아에게 할양하고, 안남(安南) 등 조공국에 대한 종주권(宗主權)을 잃었으며, 국내 요소에 외국 조계(租界)가 많이 설치되어 청왕조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동요 속에서도 근대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동치중흥(同治中興)을 통해 근대공업이 일기 시작하였으나 청일전쟁이 일어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청일전쟁 직후에는 캉유웨이[康有爲]의 점진개혁론이 활발하였으나 무술정변(戊戌政變)에 의하여 실패하고 의화단(義和團)의 북청사변(北淸事變)은 청왕조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러일전쟁 후 쑨원[孫文]이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의하여 임시 대통령에 취임하여(1912) 2,000년 이래의 전제군주제가 무너지고 공화제의 중화민국(中華民國)이 탄생되었다. 그러나 그후 약 20년간 군벌의 압제에 시달려야 했다. 쑨원의 사후에 후계자가 된 장제스[蔣介石]는 북벌(北伐)의 성공으로 양쯔강 유역에 진출하였다. 난징사건[南京事件]이 일어나 소련과 단교한 장제스는 군벌 장쭤린[張作霖]을 몰아내어 국민정부를 정통정부로 만들었다(1928). 장제스는 소련과 단교하였을 때 중국 공산당도 탄압하였다. 이때 공산당은 지하로 숨어 소련의 원조를 받았다. 일본의 침공이 격화되자 장제스는 다시 공산당과 화해하여 일본에 대항하였다. 그 동안에 공산당의 세력이 증대해갔다. 공동의 적인 일본이 패하자 국민정부와 공산당은 다시 적대관계로 돌아가 국공 내전이 계속되다가 국민정부가 패하여 타이완으로 물러가고 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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