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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공부

중국 공산당에 대한 정보 (2011-09-02)

by DIY연구소 2022. 11. 12.

 

중화인민공화국

1918년 원래 중국 공산당은 극히 혼동된 상황 속에서 출발했고, 공산당의 시작은 일찍이 1918 -19년 경에 보이기 시작 하였다. 1918-19년이라면 신해혁명에서 제3혁명에 걸친 민주주의 혁명이 좌절로 끝나고 본격적으로 '군벌시대'가 시작될 무렵이다. 그들의 민주주의는 임시변통에 불과했다. 그들은 형식상으로는 민주주의와 근대적 법체계를 지지했지만, 일단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대립이 되면 식은 죽 먹듯 민주주의와 법률을 무시했다. 각지에서 군벌이 무력을 증대함과 더불어 중앙정부의 통제는 상대적으로 힘을 잃어갔다. 그 결과 1910년대 말기의 중국에서는 청조시대에 겨우 이어져온 중앙집권마저 무너져갔다. 한편, 손문의 국민당도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의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이론은 모두 진보적 포즈를 취하고 있었던 군벌들에게 빼앗겼다.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 들어온 것은 이러한 시기였다. 각지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회 같은 것이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대교가 이끈 북경대학의 '마르크스주의 연구회(1918년)'다. 앞서 말한 그와 같은 혼미한 상황을 단번에 타파한 것이 '5.4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학생, 지식인, 시민, 노동자 등 광범위한 대중을 끌어들임으로써 세계 역사상 최초로 대중 민족주의의 위력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사실 5.4운동은 확실히 민족주의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여러 가지 민주혁명의 가능성을 남겨놓고 있었다. 그리고 이 운동이 각지로 파급됨에 따라 반군벌 민주혁명의 색채를 띄고, 광범위한 민주주의자와 아나키스트를 흡수했다. 모택동도 그러한 지방참가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20년 코민테른의 지도로 공산당이 창당되기 이르렀고, 5.4운동에 생긴 노동자의 자각과 대중조직의 경험은 중국 공산당 설립의 이론적 전제가 되었다. 그리고 민중의 자발적 투쟁과 전국적 민족혁명운동 사이에 커다란 간격이 있었는데, 이 간격을 단번에 좁힌 것이 코민테른이다. 만약 코민테른의 지도자가 없었다면, 1920년대 초기의 중국은 계속되는 이론적 혼미 속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었을 것이다. 코민테른의 밀사 그레고리, 나우모비치, 보이친스키가 중국에 들어온 것은 1920년 봄이었다. 보이친스키가 중국에 들어온 1920년 봄은 공산당을 설립하기에 조건이 좋았다. 당시의 중국에선, 5.4운동 퇴조 후의 혼미를 타파하기 위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각지에 마르크스주의 연구회가 열리고 공산주의 깃발을 내건 조직도 태동되고 있었다. 마침내 1920년 5월경, 최초로 공산주의 그룹이 결성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표면적 조직으로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을 결성하는 동시에 본격적으로 중국 공산당을 창설하기 위해 준비회를 만든다. 코민테른의 다음 사업은 이와 같은 여러 조직을 하나로 통일하고, 공산주의 이론으로 무장시키는 일이었다. 이렇게 하여 중국 공산당 제1회 전국 대표회의가 준비되었다. 당시의 중국 공산당원은 50여명, 사회주의 청년단원은 350명 안팎이었다. 이렇게 해서 중국 공산당이 탄생한다.

중국 공산당에, 중국대륙에서 신격화된 인물, 모택동이 있었다. 이 사람의 노선 확립과정은 이렇다. 모택동은 당 중앙과의 대립으로 정강산으로 퇴각을 하는데, 모택동은 당시의 공산당원 대부분 그랬듯이 소비에트 세력이 확보된 지역에서는 사회주의의 도입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모든 토지는 중농. 부농의 토지를 포함해서 모두 소비에트정부의 공유로 하고, 그렇게 하고 나서 농민에게 평등한 사용권을 인정했다. 이렇게 해서 1927년 12월 정산강 토지법을 새로 만들게 된다. 이것은 당시의 코민테른의 생각이기도 하였다. 다만 모택동은 토지 분배에 있어서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균등하게 분배하는 인구기준의 정책을 채택 하였다. 1928년 6월과 7월에 걸쳐 모스크바에서 공산당대회인 6전대회가 열리게 되는데, 출석자는 공식적으로 84명이었고, 당원수는 4만이라고 발표되었다. 여기서 중앙당의 이립삼이 연설을 통해서 모택동의 사회주의 사상을 비판한다. 이렇게 보면 중국 공산당 중앙당과 모택동의 정강산 투쟁 사이에는 상당한 의견 차이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모택동은 6전 대회가 그의 근거지를 마련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앙당과의 대립을 피하고 스스로의 사고방식을 이에 맞춰나갔다. 이렇게 해서 당 중앙과 모택동 사이에 미묘한 긴장과 협력관계가 유지되어 간다.

다음으로 중국의 공산당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중국 전체의 역사를 두고 보더라도 큰 사건 중에 하나였던 것이 '항일 전쟁(1937년 7월-1945년 8월)'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세계 경제의 위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중화민족을 멸망시키고 아시아를 단독으로 제패하고자 하였다. 즉 일본제국주의는 1937년 7월 7일 북평의 서남 완평현 노구교에 주둔해 있던 중국 군대에 공격을 하였고, 8월 13일 다시 대거 상해에 진격하였다. 이에 중국 군민은 봉기하여 저항하는데 이로부터 전국적인 항일 민족 전쟁이 시작다. 7월 8일, 중국 공산당은 즉시 전국에 전보를 보내 전 중국인민이 단결하여 민족통일전선을 축성하여 일본군의 침략에 저항하고자 하였다. 항일 민족통일전선의 수립을 촉진하기 위하여, 중국 공산당은 7월 15일, '국공합작을 공포하기 위한 중국 공산당 중앙의 선언'을 국민당에 보내 전국적인 항전 개시, 민주정치 실현, 인민 생활 개량 등 3가지 항목의 기본요구를 제출하였다. 7월 17일, 중국 공산당 대표 주은래, 진방헌, 임백거와 국민당 대표 장개석, 장충, 소력자등은 여산에서 담판을 하였다. 그러나 이때 장개석은 항일할 결심을 하지 않고, 여전히 평화적인 외교방법으로 이 사변을 해결하고자 하여 중국 공산당의 제의를 보류하였다. 8월 13일, 일본군이 대거 상해로 진격해 들어와 국민당 남경정부의 통치중심은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된다.

장개석은 정세가 이렇게 급박해지자 총 지휘부를 설치하여 항전에 참가 할 것을 동의한다. 이렇게 해서 국공 양당이 주체가 된 항일민족통일전선이 마련된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전면 항전 노선을 주장하였는데 반해 장개석은 비록 항전에 참가하기는 하지만, 항일에 대한 타협, 양보 방침을 취하고 국민당 정부와 군대가 독점적으로 항전해야 함을 주장한다. 국민당 군대의 상황과는 달리, 중국 공산당은 전면적인 항전노선을 실행하여 8로군, 신4군이 항일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8로군의 주력은 적 후방에서 각종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여 대담하게 대중을 동원하였을 뿐 아니라 적 후방에 많은 항일 근거지를 만들어냈다. 1937년 말에서 1938년 초까지, 산동에서 중국 공산당의 지방 조직은 산동 중부, 산동 남부, 산동 서부, 교동, 산동 북부 등 지역에 항일무장투쟁을 조직하고 유격전쟁을 전개한다. 이에 이르러 중국인민의 8년 간에 걸친 항일전쟁은 중국 인민의 승리로 끝났다. 9월 3일은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 기념일이기도 하다.

항일전쟁이 끝나고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의 전면전에 나선다. 1946년 6월 26일, 장개석은 정전협정과 정치협상을 파기하고 30만 대군을 4개 부대로 나누어 중원의 해방구를 대거 협공한다. 이로써 전면 내전이 발발하는데, 해방구의 군민은 중국 공산당의 지도 아래 전국 해방전쟁을 펼친다. 장개석은 자신의 우세를 믿고 정규군 병력의 80%를 집중시켜 속전속결의 전략으로 해방구에 대해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중국 공산당은 전쟁 초기에는 어쩔 수 없이 군사력에 있어 열세에 처해 있었다. 내전이 시작된 후, 인민해방군은 적극적인 방어작전으로 우수한 병력을 집중적으로 이동, 배치하면서 국민당군을 섬멸하기 시작 한다. 1946년 8월, 국민당군은 중원해방군의 부대를 포위, 압박해 들어왔으나, 대부분 해방군에 의해 하남 서부, 섬서 남부 지구에서 저지당했고, 국민당 병력들도 쇠퇴하기 시작한다. 1946년 7월에서 1947년 2월까지의 8개월 동안, 인민해방군은 160여 차례의 전투를 거쳐 국민당군 66개 여단 71만 명을 섬멸하여 결국 국민당군의 전면공격을 분쇄하였고, 전세는 인민해방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역전 된다. 결국 장개석 정부는 이미 인민 전체에 의해 포위 당하는 꼴이 되어버리고 대만으로 피신을 하여 정권을 창출 한다.

국민당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다. 그러나 광대한 중국에 하나의 근대적 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은 용이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앞두고 있는 이때에 소련의 원조와 경험이 중요시 되였다. 1949년 12월 6일, 모택동은 처음으로 모스크바로 떠난다. 그러나 교섭은 예상외로 난항이었다. 모택동은 많은 점에서 명백하게 양보하였다. 그 대신 중국은 1950년부터 54년까지 합계 3억불의 차관을 얻게 되었다. 모택동은 50년 2월 귀국 후 국내 문제에 전력을 기울였다. 당 대회에서 모택동은 경제문제에 역점을 두게 되는데, 그가 강조한 것은 역시 토지개혁이다. 토지개혁을 실행하지 않는 한 농촌의 생산력은 봉건적 토지소유제의 속박에서 해방될 수 없으며 신중국의 공업화를 개척할 수는 없었다. 또한 공업화가 진전되지 않는 한 중국민중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속에서 중국에 크나큰 충격을 준 것은 한국전쟁의 발발이다. 즉 1950년 6월 25일, 돌연 한반도에 발생한 군사 충돌로 중국은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한국전쟁은 중공에 있어서는 크나큰 시련이며 마이너스 요인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반면 중국 공산당은 이 위기를 지렛대로 하여 다른 의미에서의 성과를 올렸다. 예를 들면, 중공은 인민지원군의 한국전 출병과 티벳에도 군대를 진군시켜 그곳은 공산화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또한 50년에서 51년에 거쳐 '반혁명'도 철저하게 진압되고 이것을 배경으로 토지개혁도 대대적으로 진전되는 성과를 얻게 되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하의 계속혁명론'을 신봉하고 있던 모택동은 결국 1966년 엄청난 오류를 범하는데 이것이 문화 대 혁명이다. 당시 모택동의 생각은 문화 대혁명을 통해서 공개적이고 전면적으로, 또 아래로부터 위로 많은 대중을 분발 시켜, 위에서 본 어두운 부분을 폭로하여야만 주자파가 탈취하여 간 권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실상 한 계급이 한 계급을 타도하는 정치대혁명이다. 1965년 11월 10일, 상해 '문회보'에는 강청과 장춘교 등 비밀조직에 의해 씌어진 요문원 필명의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가 발표되었다. 이 글과 이것을 이은 문예예술 영역에서의 비판운동이 문화 혁명의 시작으로 문화 대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모택동은 [해서파관]의 비판에 지지를 보냈다. 모택동은 청년학생들을 문화 대혁명에 전면에 배치, 앞장 서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홍위병'이다. 문화 혁명 중 전국적인 청년학생들의 운동으로 1966년 5월 29일, 청화대학 부속 중학에서 첫 번째 홍위병 조직인 청화부중홍위병이 조직된다. 이에 모택동이 지지를 보내고 천안문에서 각지의 홍위병을 사열한 것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홍위병이 조직되었다. 홍위병은 강청, 임표의 선동아래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을 타파한다는 미명 하에 고전 저작을 불태우고 명승고적을 파괴하였을 뿐 아니라 함부로 사람들을 잡아 심판하고 가두기도 하였다. 나아가 각 지도기관 까지도 마구 파괴함으로써 전국을 내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 넣었다.

1978년 8월 19일, 중국 중앙공산당에 의하여 결국 홍위병 조직은 해산되지만 문화 대혁명은 전국 범위의 혼란국면은 날로 심각해졌다. 끝으로, 모택동은 비록 문화 대혁명의 구체적인 잘못 또는 그 방법에 있어서의 잘못은 시인 하였으나, 문화 대혁명은 '반듯이 필요한 것'이었고 그 성과 또한 중요하였다고 끝까지 인식하였다. 그는 결코 문화 대혁명의 착오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등소평의 제의를 인정하지 않았고, 1975년 11월 말 다시 '등소평을 비판 한다. 1976년 9월 9일, 중국 인민의 지도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인 모택동은 서거한다. 그의 서거는 전당, 전군, 전국 각지역 인민들을 극도의 비통 속으로 몰아넣었지만, 사인방 음모가 반혁명 무장정변으로 나아가는 긴급한 시점에서 강청, 장춘교, 요문원, 왕흥문에 대해서 격리 수사를 진행하였다. 강청과 반혁명집단을 분쇄함으로써, 중국공산당은 위급함 속에서 당과 나라를 구하고 10여년 간의 엄청난 내란을 종결, 중국은 새로운 역사로 진입하게 된다. 이렇게 문화 대혁명은 끝을 맺는다.

1976년 10월, 화궈펑은 당주석에 취임, 국무원총리를 겸임하고 예젠잉[葉劍英] 부주석, 후에 재복권(再復權)한 덩샤오핑 부주석/부총리와 함께 마오쩌둥 사망 후의 중공의 최고지도부를 형성하였다. 1977년 8월에 열린 11전대회 (十一全大會)는 ‘4인방’ 비판의 강화를 호소함과 동시에, 제1차 문화대혁명의 종결을 선언하였다. 그 후 화궈펑도 덩샤오핑의 개혁에 밀려나고, 1981년 덩샤오핑/후야오방[胡耀邦]/자오쯔양[趙紫陽]체제가 확립되었다. 1982년 9월 12전대회(十二全大會)에서 마오쩌둥의 극좌적(極左的) 잔영이 지워진 새 당헌(黨憲)을 채택, 당총서기(黨總書記) 중심제를 부활하고 정치국(政治局)과 서기국(書記局) 등 당의 지도체제를 개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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